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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koosk 작성일18-08-20 09:29 조회56회 댓글3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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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yo님의 댓글

myo 작성일

세상에는 고통과 불행이 넘쳐난다. 세계 곳곳의 사건사고를 거의 실시간으로 알려주는 미디어 덕분에 개인이 파악할 수 있는 불행과 불의의 범위는 이제 전 세계를 포괄한다. 타인의 고통에 공감할 수 있는 인간이라면 어떤 정보에 대해 ‘부인’하지 않고 자신의 일에만 집중하기란 힘든 일이다.

‘알면서도 모르는 상태’는 부인 개념의 핵심이다. “세상이나 자신에 관해 백퍼센트 진실도 아니고 그렇다고 남을 속이려는 거짓말도 아닌 진술이 있기 때문에, 무엇인가를 알면서도 동시에 모르는 기이한 상태가 생겨난다. 사람들이 어떤 사실을 부인하더라도, 그것의 존재를 ‘어떤 식으로든’ 알고 있을 뿐 아니라, 동시에 그 사실을 부인하는 진술을 ‘어떤 식으로든’ 믿고 있음에 분명하다.”(90쪽)

우리는 사회의 고통에 어렵게 시인(부인을 경감·해결하려는 움직임)하기보다는 불편한 진실에 눈을 감는 좀 더 쉬운 길을 택한다. 이러한 개인 차원의 부인은 공동체의 고통에 둔감해지는 것을 넘어 어떤 경우, 책에서 예를 든 ‘제노비스 사건’(1964년 뉴욕에서 귀가하던 여성이 습격을 받고 사투를 벌이던 40분 동안 동네사람 누구도 도움을 주거나 신고하지 않아 결국 숨지게 된 사건)과 같은 비극으로 이어진다. 이러한 사건이 어떻게 일어났는지 원인을 특정할 수는 없지만, 사람들이 이렇게 방관자가 되는데 영향을 주는 요인들이 있다. ‘현장의 사람 숫자, 모호성과 해석, 예상되는 타인의 반응, 보상의 기대·효용·리스크, 사회정의와 형평성, 죄책감과 책임, 동정과 공감, 동일화’가 그것들이다. 요인들을 안다고 이러한 일을 예방할 수 있을까? 저자는 “개인의 태도가 아니라, 애초의 상황인식이 구체적 행동으로 이어지지 않게 하는 집단적인 부인의 언어가 문제”(179쪽)라고 말한다.

부인의 문제에서 집단의 문화/언어는 중요하다. 개인 차원의 미시적 부인을 넘어 조직과 국가 차원의 거시적 부인은 ‘정상화 과정’(어떤 일탈 현상을 정상으로 간주하고 거기에 정당성을 부여하는 과정)(141쪽)으로 정당성을 얻게 되고, 그러한 조직에 소속된 개인은 더욱 쉽게 부인에 동조하게 된다. 반대로 어떤 문제가 정치적 사안으로 떠오르고 공론화되면 이전까지 ‘정상적’이었던 일이 이제는 정상이 아닌 사회적 분위기가 조성되며, 피해자들이 스스로에게 부과했던 부인, 자책, 소극성들을 털어내고 적절한 해결방안을 찾기 쉬워진다. 최근에 폭발적으로 촉발된 ‘미투운동’ 또한 여성을 대상으로한 성적 폭력에 대한 사회의 ‘정상화 과정’이 깨어진 맥락으로 볼 수 있을 것이다.

저자는 “우리는 왜 현실에 눈을 감는가?”라는 질문을 바꿔 “우리가 현실에 눈을 감지 않는 이유는 무엇인가?”라고 묻는다. 저자가 예를 든 ‘현실을 외면하지 않은’ 사람들은 위대한 영웅이 아니었다. 다만 가까운 이웃이든 먼 나라 사람들이든 그들의 고통을 자각하고, 그것을 외면할 수 없었던 보통 사람들이었다. 그들은 이렇게 말한다. “나는 특별한 일을 한 게 아니에요. 누구라도 그 자리에 있었으면 똑같이 행동했을 겁니다.” 그들의 이러한 특징을 저자는 “덕의 평범성”(533쪽)이라 표현한다. “자신이 인류공동체에 속해 있다는 자아의식(포용성)”(534쪽)에 기인한 그들의 이타주의는 유별난 용기를 내야하는 것이 아니라 내면에서 자연스럽게 우러나온 평범한 것이었다. 그러나 그들 개인의 평범함은 사회적으로 비범하게 느껴진다.
위의 ‘제노비스 사건’의 예에서 방관자들이 결과적으로 동일하게 아무런 행동을 취하지 않았다 하더라도, 그 과정에서 그들이 가진 정신상태를 구분해보는 것은 중요하다. 저자는 “인지의 차단, 도덕적 망각, ‘염려’ 등은 아주 다른 세가지 정신상태”이며 이러한 구분은 “방관자의 수동성을 타개하기 위한 교육이나 정치적 노력에는 의미가 있다”(182쪽)고 말한다. ‘염려’했지만 행동을 취하지 않은 사람들은 적절한 문화, 제도, 교육에 따라 좀 더 쉽게 시인할 수 있을 것이다. 저자는 사람들이 더 많이 시인하게 하기 위해 ‘교육과 예방, 법적인 강제, 호소, 시인할 수 있는 통로를 만들어주기’ 등을 사회·정치적 전략으로 제안한다. 마지막으로 개인에게는 ‘훌륭한 시민성’을 강조한다. 이는 “거창한 영웅적 행동을 요구하지는 않지만, 평범한 침묵을 장려하지도 않는”(557쪽)것을 말한다. 평범한 침묵은 평범을 가장하기에 더 무겁다. 우리는 어떻게 이 무거운 침묵을 뚫을 수 있을까.

“후기자본주의는 그 본질상 부인의 문화를 창조한다.”(586쪽) 난민, 기아, 빈곤층, 실업자, 노숙자, 일할 수도 없고 돌봐줄 사람도 없는 노령인구 등 자본주의의 편리하고 화려한 외양 밑에서는 체제에 불필요하다 여겨지는 존재들이 계속 만들어진다. 그들은 ‘사회적으로’ 부인되고 배제되며, 눈에 띄지 않는 장소로 점점 밀려난다. 저자는 책의 말미에 ‘바싹 마른 알비노 아이’의 이미지를 묘사한다. 이러한 사진을 볼 때 우리는 평화로운 일상과의 급격한 단절을 느낀다. 이 사진에 대해 평론을 쓴 존 버거는 “우리가 방금 본 것을 기억하면서 우리 일상을 다시 시작한다는 게 얼마나 터무니없는 짓일까.”(603쪽)라고 말한다. 우리는 절망하고 분노하고, 결국에는 부인하며 일상으로 돌아온다.
그러나 이미지의 잔상은 오래 남는다. 얼마 전 길거리에서 보게 된 한 노숙자의 이미지가 나에게는 그러했다. ‘현실에 눈을 감지 않은’ 평범한 위인들이 ‘인류공동체에 속해 있다는 자아의식’에 기인한 덕의 평범성을 가졌다면, 적어도 우리 주위에 있는 어떤 존재들의 이미지에 눈을 돌리지 않는 것, 그들이 거기에 있음을 ‘자각’하는 것이 ‘시인’의 시작이 아닐까.

學而님의 댓글

學而 작성일

안희정의 성범죄 혐의가 1심에서 무죄를 받았다. 그는 “도덕적 책임은 피하지 않겠지만, 법정에서만큼은 정의로운 판결을 내려달라”고 주문했다. “도덕적 책임”이란 대체 무엇이며, 그는 그것을 어떻게 감수하겠다는 것일까? 모호하기 그지없는 이 말은 아마도 욕은 먹을지언정 법적 책임은 지지 않겠다는 표현인 듯하다. 별 의미 없는 도덕적 책임을 내세워 법적 책임이라는 실제 책임을 피하려는 권력자들의 행태를 일컬어 철학자 아감벤은 “힘 있는 자의 오만”이라 정의했었다.
 
그는 최후진술에서, “...하지만 이것 하나만큼은 꼭 말하고 싶은 게 있다. 저는 지위를 가지고 위력을 행사한 바가 없다. 어떻게 지위를 이용해 다른 사람의 인권을 빼앗겠나. 저는 지위를 가지고 위력을 행사한 바 없다.”고 했다. 처음에 죄를 시인하는듯하던 그는 어느새 모든 것을 부인하고 있었다. ‘위력’없는 애정행위였다는 식의 표현을 스탠리 코언은 ‘해석적 부인’으로 규명한다. 행위는 인정하되 다르게 해석하는 것, 아전인수격 해석을 말한다.
 
안희정의 진술을 스탠리 코언의 관점에서 본다면, ‘새빨간 부인’은 없었으되 ‘흠집 내기’와 ‘호칭 변경’, 그리고 온갖 ‘정당화 논리’가 가득하다. ‘새빨간 부인’이 없었다는 것도 아마 부인하기 힘든 정황 때문이지 않을까. 피해자의 행실을 문제 삼는 ‘흠집 내기’는 남성중심 사회에서 많이 보아 온 지극히 상투적이고 진부한 2차 가해 전략이다. ‘호칭 변경’은 성폭력을 합의된 불륜으로 호도하는데, 폭력을 연애로 포장하는 가해자의 전형적인 자기방어술이다. ‘정당화 논리’는 대개 피해자의 행동이나 상황적 여건을 핑계 삼아 그러한 상황에서 어쩔 수 없었다는 식의 논지를 전개한다. 자기 합리화의 극치가 아닐 수 없다. 아무리 정당화를 한들 나이가 스무 살이나 차이 나는데 이성적 감정으로 상대가 먼저 접근했다는 주장은, 대단한 문학적인 상상력이거나 망상 수준의 나르시시즘이다.

꾸준히 개선되고 있지만 인권침해는 모든 사회가 가진 문제일 것이다. 코언은 왜 성폭력과 같은 인권침해가 드러났는데도 가해자는 끝까지 그것을 부인하고, 많은 관찰자들은 방관자가 되어 눈을 감아버리는 지에 대한 문제의식으로 이 책을 썼다. 그는 ‘부인’의 방식과 유형을 몇 가지 범주 안에서 이루어지고 있음을 밝혀내었다. 코언이 제시한 부인(denial)의 논리와 유형은, 안희정을 비롯하여 한국 사회에서 자신의 과오를 부인하는 이들의 언어를 분석하는 틀로 유용하다. 그들 언어의 진부함과 상투성을 대번에 확인할 수 있다는 점에서 매우 뜻깊은 까닭이다.

수경님의 댓글

수경 작성일

1. 누구나 부인을 한다, 나 역시. 본능적이다. 하지만 부인 이후가 문제다. 우리 뇌의 여과장치-지적 능력-가 어떻게 얼마나 작동하느냐에 따라 달라진다. “하지만 부인을 너무 괴로워할 필요는 없다. 인간은 원래 그런 존재이기 때문에(135쪽).”

2. 자기 논리를 안 바꾼다. 요즘 여기저기서 그런 생각을 많이 하게 한다. 좌와 우, 보수와 진보 사이가 아니라 이야기가 좀 통할 수도 있을 것 같은 진보끼리, 보수끼리가 오히려 더하다. 문제는 서로에게 그렇게 손가락질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들은 논리를 바꾸지 않아.’ ‘그건 너도 그래, 너는 왜 빼니?’ 최소한 그거라도 인정하자. 하지만 이 작은 일이 그리 힘들다. 거대한 논리도 뭣도 아닌 걸 못 바꾸는 것이다. 그게 인간이다. “일단 부정직하게 행동하기 시작하면 살아있는 동안 다시는 진심어린 행동을 하지 못한다(122쪽).” “부인은 언제나 부분적인 현상이다(86쪽).”

3. 시인의 문화는 가능한가? 글쎄, 답이 쉽지 않다. 부정적이다. 바닥을 치고 있는 것 같기도 하다. 바닥을 치면 어딘가 다른 세상이 가능할 수도 있겠다. 우리가 내가 견딜 수만 있다면. 인간이라는 종에게 점점 절망적이다. 나이 들수록 강퍅해지는 것 같아 더욱 우울하고 절망적이다. ‘왜 이 모양이지. 왜 나는 갈수록….’ 굴곡지고 왜곡된 우리의 현대사에 청산할 적폐가 얼마나 많은가. 청산이 불가능하다 싶을 정도다. 반동과 반격 등 방어와 망각도 거세기 때문이다. 한 놈(분야)만 정해서 졸라 패야 하나? 나이를 먹을수록, 사람을 (오래) 만날수록, 책을 읽을수록 절망적인 이유도 그렇다. 우리는 나이를 먹을수록 책을 읽을수록(읽지 않아도!) 굴곡지고 왜곡된다, 뇌와 마음이 함께. 자기 논리와 자기 생각으로 무장하는 것이다. 자기성찰이나 반성은 어렵다.

4. 늘 길을 찾는다. 별 수 없(었)던 길. 기억의 길, 읽기의 길을 택하겠다. 그것밖에 길이 없다. “신과 국가, 혁명, 민중 같은 강력한 세계관에 호소함으로써 자기 정당성을 확보하는 해명방식은 오웰이 경고한 사악한 존재를 낳는다. 오웰이 말한 ‘민족지상주의’는 좁은 의미의 공격적이고 인종주의적 민족지상주의만이 아니라, 자신과 다른 현실 일체를 부인함으로써 자기 존재를 유지하는 모든 이념을 의미한다(163쪽).” 코언의 이 책을 읽고 내게 남은 건 오웰의 어떤 정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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